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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통령 탄핵 반란

합법적으로 집권해 ‘혁명’을 추구한 정권들, 그 끝은?

j.and.h 2017. 10. 29. 19:28

합법적으로 집권해 ‘혁명’을 추구한 정권들, 그 끝은?

 

⊙ 독일 - 나치 위험에 무지했던 보수세력이 히틀러 집권의 길 열어줘, 1년 만에 전체주의 국가로 변모
⊙ 비시 프랑스 - 패전의 와중에 제3공화국의 ‘적폐청산’ 명분으로 비시정권 수립, 민주공화정 전통 훼손
⊙ 칠레 - 아옌데, 미국 중심 질서에서 이탈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추진하다가 쿠데타로 몰락
⊙ 베네수엘라 - 차베스, ‘적폐청산’ 내걸고 포퓰리즘·사회주의·민족주의 혼합된 ‘볼리바르혁명’ 추진 …, 19년 만에 국가파산

합법적으로 집권해 체제변혁을 추진한 지도자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으로 차베스, 아옌데, 페탱, 히틀러.
  이른바 ‘최순실사태’가 시작된 지 1년이 됐다. ‘국정농단’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결국 대통령의 탄핵과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새로 들어선 정권은 ‘촛불혁명정권’임을 자처한다. ‘적폐청산’은 국정의 제1과제가 됐다. 사법부에는 ‘개혁적’인 수장(首長)이 들어섰고, 정부·여당의 응원을 받는 방송사 노조는 기존 경영진 보고 물러나라고 파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에서는 개헌(改憲)논의가 진행 중이다. ‘제7공화국’을 입에 올리는 사람도 있다. 핵무장한 북한의 위협, 안하무인격인 중국의 겁박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일본과의 관계는 자꾸만 소원해지고 있다.
 
  ‘촛불혁명’의 끝은 어디일까? 혹시 ‘어, 어’ 하다가, 우리가 알고 있던 대한민국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합법적으로, 혹은 합법의 외피(外皮)를 쓰고 정권을 잡은 세력이 체제변혁을 꾀했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나치 독일 - 보수정치인들의 착각이 전체주의를 부르다
 
  ■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독일에는 바이마르공화국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군국주의적 군주정에 익숙해 있던 독일인들에게 공화국은 생소한 정체(政體)였다. 거기에 바이마르공화국은 독일인들의 자존심을 훼손한 가혹한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였다는 원죄(原罪)를 안고 있었다. 좌우갈등, 1920년대 초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1920년대 후반의 세계대공황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국민들은 절망에 빠졌고, 민주공화국에 대한 회의(懷疑)는 깊어졌다. 이 틈을 타서 히틀러의 나치즘이 대두했다. 몇 차례의 선거를 거치며 나치당은 의회 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1933년 1월 30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이후 1년 사이에 히틀러는 독일을 전체주의 1당 독재국가로 둔갑시켰다.
 
 
  나치의 대두
 
  1919년 1월 안톤 드렉슬러라는 뮌헨의 자물쇠 상인이 독일노동자당이라는 작은 정치서클을 만들었다. 그해 9월 바이에른지구 육군사령부 정치부 공보과에 근무하고 있던 하사관 하나가 독일노동자당을 사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 하사관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며칠 후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의 초청을 받아들여 당에 입당했다. 당은 1920년 4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국가사회주의(나치즘)’란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군국주의, 반(反)유대주의, 사회주의가 어지럽게 혼합된 ‘잡탕사상’이었다.
 
  처음에는 당의 선전을 담당했던 히틀러는 광적인 선전선동 능력과 조직 능력을 인정받아 1921년 7월 당권을 장악했다. 1923년 11월 8일, 히틀러는 나치당의 준(準)군사집단인 돌격대(SA)를 이끌고 뮌헨의 맥주홀에 난입, 그 자리에 있던 바이에른 주정부의 요인들에게 총기를 들이대고 ‘우익혁명정권’의 수립을 강요했다.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 히틀러는 1년간 복역했다. 감옥에서 나온 후 히틀러는 당 조직을 재건하고, 폭력혁명 대신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1920년대 후반 대공황 이후 절망에 빠진 독일인들은 좌우(左右) 할 것 없이 기성 정치세력을 공격하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것 같은 포퓰리즘 공약을 쏟아내는 히틀러에게 매료됐다. 1930년 총선에서는 640만여 표를 얻어 전체 577석 가운데 107석을 차지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현직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도전했다. 그는 1차 투표에서 30.1%, 2차 투표에서 36.1%를 득표,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의 지지를 받아 1370만 표를 얻었다. 230석을 차지한 나치는 국회 제1당으로 올라섰다.
 
 
  나치, 침몰 위기에 처하다
 
히틀러에 앞서 바이마르공화국 총리를 지낸 프란츠 폰 파펜(왼쪽)과 쿠르트 폰 슐라이허(오른쪽).
  당시 독일 정치는 알게 모르게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에서 후퇴하고 있었다. 11년 동안 9명의 총리 아래서 내각이 17번이나 바뀌었다. 일종의 2원집정부제이던 바이마르헌법 아래서 내정의 책임은 의회 다수당에서 배출한 총리(이를 ‘의회 총리’라고 한다)가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1930년부터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자신에게 부여된 총리 임명권과 비상대권을 이용해, 의회 다수당의 지지에 의지하지 않고 총리를 임명하기 시작했다(이를 ‘대통령 총리’라고 한다). 단독으로 내각을 구성할 수 없었던 사회민주당, 가톨릭중앙당(기독교민주당의 전신) 등은 이런 상황을 묵인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일탈이 시작된 것이다. 1932년에 이르러 힌덴부르크는 측근인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 등을 잇달아 총리로 임명했다.
 
  1932년 7월 총선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자신을 ‘대통령 총리’로 임명해 주기를 바랐다. 히틀러는 부총리로 입각하라거나, 나치당에 장관 자리를 몇개 나누어 줄 테니 정부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 이런 히틀러에게 실망한 유권자들이 돌아섰다. 1932년 11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넉 달 전에 비해 200만 표를 잃었다. 의석도 196석으로 줄어들었다.
 
  1933년 정초 《프랑크푸르트차이퉁》은 신년 사설에서 ‘마침내 민주국가에 대한 나치의 공격을 물리쳤다’고 썼다. 사회민주당 기관지 《전진》은 ‘히틀러의 부상과 침몰’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런 상황 아래서 나치당은 크게 흔들렸다. 후원금과 당비 납부가 급감해 미국 금융회사에 돈을 빌려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재정난이 심해졌다. 히틀러의 리더십에 반발한 그레고르 슈트라서 등 고참 당원이나 일부 지역 돌격대 대장들이 이탈했다.
 
 
  모리배들이 나치를 살리다
 
  하지만 그달이 가기 전에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로 임명됐다.
 
  여기에는 힌덴부르크의 측근정치와 보수우익세력의 오판(誤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힌덴부르크는 참모인 슐라이허 장군의 조언에 따라 1932년 7월 무명의 국회의원인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했다. 파펜은 힌덴부르크에게 아부해서 순식간에 그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당초 파펜을 자기의 허수아비로 생각했던 슐라이허는 공작을 꾸며 파펜을 실각시키고 그해 12월 총리가 됐다. 친구였던 파펜과 슐라이허는 원수가 됐다. 여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신임을 받고 있던 파펜은 슐라이허를 무너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슐라이허를 미워하던 힌덴부르크의 아들 오스카 폰 힌덴부르크, 기회주의적 관료인 대통령 비서실장 오토 마이스너도 여기에 가담했다.
 
  파펜은 히틀러를 명목상의 총리로 하고 자신은 실세(實勢) 부총리가 되는 보수우익 연립정권을 제안했다. 파펜의 제안에 히틀러는 11명의 각료 자리 가운데 3자리만을 요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나치 중에서는 빌헬름 프리크가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장관 겸 프로이센주 내무장관으로 입각했다. 보수정당인 국민당 당수인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 프로이센주 경제장관 겸 농무장관이 됐다. 파펜과 후겐베르크는 자기들이 얼마든지 히틀러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김대중 정권이 출현하는 데 보수정치인인 김종필씨가, 노무현 정권이 출현하는 데 정몽준씨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을 정비하는 데 김종인씨가 힘을 빌려주었던 것을 연상케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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