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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한민국

김구와 동학 (근현대사 연구회)

j.and.h 2018. 9. 28. 22:31

김구와 동학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구가 어린 나이에 동학군의 해주전투에 참여하는 등 동학혁명의 핵심으로 활약했다고 찬양한다. 또한 스무살 무렵엔 민비 살해범으로 추정되는 일본 육군 장교 스치다의 살해를 국모에 대한 복수라고 하여 또한 칭송한다. 

동학이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은 민비 정권의 요청으로 2000명의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한 소위 청병조칙 때문이었다. 일본은 청군의 이러한 움직임에 1885년에 맺어진 천진조약을 빌미로 조선에 파병하여, 결국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그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군과 조선 관군의 연합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은 힘없이 괴멸될 수밖에 없었다. 

백범일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김구가 동학농민군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면 민비의 죽음을 그렇게 슬퍼하고 흥분할 수 있었을까? 동학농민군을 괴멸시킨 것이 다름아닌 민비인데 말이다.


김구는 과연 동학의 접주였나?

(접주 [接主] 동학의 교단 조직인 접의 책임자)

김구의 주장에 의하면 그는 나이 열아홉에 동학의 정식 접주가 되었고, 곧 고향으로 돌아와 팔봉이란 접명(接名)을 지었다고 한다. 

동학의 접주 자격은 포교 능력에 따라 점수를 매겨 부여하였는데, 포교 인원 105명 이상인 사람은 접주, 500명 이상은 대접주가 되는 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이러한 관례에 따르면 김구(창수)는 나이에 상관없이 접주에 임명될 수도 있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를 따르는 동학교도가 무려 수천에 달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돈화(李敦化, 1884-?)가 편술한 《천도교창건사》 등 동학이나 시천교, 천도교 등의 자료 어디에도 19살 접주, 김창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결정적인 자료가 있다. 백범일지에도 등장하는 최유현(崔琉鉉)이 1918년에 정리하고 1920년에 편찬한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를 보면 최유현 등 황해도 대표가 보은을 방문하여 최해월(최시형)로부터 접주 임명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김구에 의하면 계사년(癸巳年, 1893년) 가을에 오응선, 최유현 등이 경통 (敬通)을 받고 충청도 보은에 있는 해월 대도주를 방문하는 일행 열다섯 명에 자신도 선발되어 최시형을 만났고 그곳에서 접주 첩지를 받았고 한다. 

계사년은 갑오년(甲午年, 1894년)의 착오라 하더라도 김구는 자신의 입으로 분명히 정식 접주가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최유현은 자신 외 6명이 대선사를 방문했고 자신은 해서(海西)수접주로 임명되었다고 기록했다. 

김구의 주장과 차이가 너무 많다. 15명과 6명의 차이 그리고 김창수는 아예 언급이 없다. 백범일지에 나오는 대표적인 허위과장 광고이다.

- 출처: 한국근현대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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