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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칼럼] 대한민국 과거가 '暗黑의 역사'였다고? 본문
[강천석 칼럼] 대한민국 과거가 '暗黑의 역사'였다고?
강천석 논설고문 | 2018/01/20 00:49
한국은 올해 '30-50' 클럽에 들어간다. '30-50 클럽'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인 나라를 가리킨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대체로 국민소득이 낮다. 국민소득이 높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싱가포르는 인구가 500만~1000만명 수준이다. 두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나라는 생각보다 드물다. 일본(1992년)·미국(1996년)·독일(2004년)·영국(2004년)·프랑스(2004년)·이탈리아(2005년) 순서로 이 문턱을 넘었다.
'30-50 클럽' 멤버들은 1차, 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을 벌였던 사이다. 100년 전 강대국이다. 독일은 두 번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두 번 다 패전해 국토는 잿더미가 됐고 1000만명 가까운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침략 전쟁 끝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310만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두 나라는 폐허에서 재출발해 불과 몇십년 만에 세계 'No.2' 'No.3' 경제 대국으로 부활했다. 라인강의 기적, 섬나라의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한국은 오랜 세월 지도(地圖)에서 지워졌던 나라다. 그 나라가 '30-50 클럽'의 일곱 번째 멤버가 된다. 다른 멤버들이 패권(覇權)을 놓고 부딪쳤던 20세기 초 한국은 식민지였다. 식민지 되기 전엔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국토를 전쟁터와 전쟁 기지(基地)로 내놔야 했고, 백성은 전쟁 물자를 나르는 짐꾼으로 징발됐다.
일본이 중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어린 처녀들은 전쟁 위안부로, 청·장년 남자들은 남태평양 포로수용소 경비원으로 징용됐다. 지일파(知日派) 김종필 전(前) 총리는 마을에서 처녀들이 일본군과 계약한 업자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포로수용소 조선 경비원들 상당수는 B·C급 전범(戰犯)으로 분류돼 교수대(絞首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5년 일본 패망(敗亡) 덕분에 맞이한 해방도 시련의 끝이 아니었다. 국토는 두 동강 났다. 100만명 가까운 피란민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좌·우(左·右) 파는 학교·공장·거리에서 피투성이 싸움을 벌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2년 후 김일성이 기습 남침했다. 소련·중국을 등에 업은 북의 공세(攻勢)에 밀려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 언덕에 기대 간신히 숨을 쉬어야 했다. 미국이 참전(參戰)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대한민국은 바다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전쟁 이후도 순탄하지 못했다. 민간 독재가 끝나면 군부 독재가 들어섰다. 숨이 막히기도 했다. 억울한 옥살이, 억울한 죽음도 있었다. 요즘 젊은 영화감독들은 그 시절을 암흑(暗黑) 시대로 그리고, 그 화면(畵面) 앞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은 단체로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그 시절이 그냥 깜깜하기만 했다면 이 나라가 2012년에 '20-50 클럽', 6년 후엔 '30-50 클럽' 멤버가 됐을 리 없다. 생머리 잘라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고, 피복 공장에서 밤낮없이 미싱 돌리고, 중동 사막에서 모랫바람 맞고, 독일 광산 수백m 지하에서 석탄을 캐던 한국인들이 있었다. 자동차 정비 공장 사장 정주영은 조선(造船) 회사를 차리고, 설탕·밀가루 공장 하던 이병철은 반도체 공장을 짓고, 쇠하고는 인연이 먼 박태준은 포항 해변에 제철소 기둥을 박았다.
요즘 하루가 아슬아슬하다. 정부 안에 '평창 이후(以後)'를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 낭떠러지 길에서 김정은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멋진 그림만 그린다. 정부 부처 심지어 대법원까지 적폐(積弊) 청산한다며 역사에 삽질하고 있다. 국가의 연속성, 법의 안정성은 안전(眼前)에 없다. 한·미동맹도 옛동맹이 아니다. 일본은 1930년대 동맹 정책을 그르쳐 패망(敗亡)의 길로 들어섰다. 만약 일본이 탐욕(貪欲)을 절제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승전국(勝戰國)이 됐더라면 한국 독립은 1960년대로 미뤄졌을지 모른다.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못할 위안부 합의를 다시 주물러 일본 내 혐한(嫌韓) 세력의 기(氣)만 살려 줬다.
현 대통령과 전전(前前)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주고받고 있다.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치 보복 순서를 따라가고 있다. 핵심을 벗어나 대통령 부인과 명품(名品)을 엮는 서툰 수법도 비슷하다. 사냥꾼은 바뀌어도 사냥개는 옛날 그 검찰 그 국세청이다. 개헌을 하든지 아니면 청와대 옆에 교도소를 짓든지 할 일이다.
대한민국을 '30-50 클럽'에 올려놓는 데 무슨 공(功)을 얼마나 세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나라가 당신들 나라냐'는 소리가 목젖 부근까지 올라온다.
강천석 논설고문 | 2018/01/20 00:49
한국은 올해 '30-50' 클럽에 들어간다. '30-50 클럽'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인 나라를 가리킨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대체로 국민소득이 낮다. 국민소득이 높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싱가포르는 인구가 500만~1000만명 수준이다. 두 기준을 동시에 충족하는 나라는 생각보다 드물다. 일본(1992년)·미국(1996년)·독일(2004년)·영국(2004년)·프랑스(2004년)·이탈리아(2005년) 순서로 이 문턱을 넘었다.
'30-50 클럽' 멤버들은 1차, 2차 세계대전 때 전쟁을 벌였던 사이다. 100년 전 강대국이다. 독일은 두 번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두 번 다 패전해 국토는 잿더미가 됐고 1000만명 가까운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침략 전쟁 끝에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세례를 받고 310만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두 나라는 폐허에서 재출발해 불과 몇십년 만에 세계 'No.2' 'No.3' 경제 대국으로 부활했다. 라인강의 기적, 섬나라의 기적이라 부를 만하다.
한국은 오랜 세월 지도(地圖)에서 지워졌던 나라다. 그 나라가 '30-50 클럽'의 일곱 번째 멤버가 된다. 다른 멤버들이 패권(覇權)을 놓고 부딪쳤던 20세기 초 한국은 식민지였다. 식민지 되기 전엔 '청·일전쟁' '노·일전쟁'에서 국토를 전쟁터와 전쟁 기지(基地)로 내놔야 했고, 백성은 전쟁 물자를 나르는 짐꾼으로 징발됐다.
일본이 중국 미국과 전쟁을 벌이자 어린 처녀들은 전쟁 위안부로, 청·장년 남자들은 남태평양 포로수용소 경비원으로 징용됐다. 지일파(知日派) 김종필 전(前) 총리는 마을에서 처녀들이 일본군과 계약한 업자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포로수용소 조선 경비원들 상당수는 B·C급 전범(戰犯)으로 분류돼 교수대(絞首臺)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5년 일본 패망(敗亡) 덕분에 맞이한 해방도 시련의 끝이 아니었다. 국토는 두 동강 났다. 100만명 가까운 피란민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좌·우(左·右) 파는 학교·공장·거리에서 피투성이 싸움을 벌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2년 후 김일성이 기습 남침했다. 소련·중국을 등에 업은 북의 공세(攻勢)에 밀려 불과 한 달 만에 낙동강 언덕에 기대 간신히 숨을 쉬어야 했다. 미국이 참전(參戰)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대한민국은 바다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전쟁 이후도 순탄하지 못했다. 민간 독재가 끝나면 군부 독재가 들어섰다. 숨이 막히기도 했다. 억울한 옥살이, 억울한 죽음도 있었다. 요즘 젊은 영화감독들은 그 시절을 암흑(暗黑) 시대로 그리고, 그 화면(畵面) 앞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은 단체로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그 시절이 그냥 깜깜하기만 했다면 이 나라가 2012년에 '20-50 클럽', 6년 후엔 '30-50 클럽' 멤버가 됐을 리 없다. 생머리 잘라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고, 피복 공장에서 밤낮없이 미싱 돌리고, 중동 사막에서 모랫바람 맞고, 독일 광산 수백m 지하에서 석탄을 캐던 한국인들이 있었다. 자동차 정비 공장 사장 정주영은 조선(造船) 회사를 차리고, 설탕·밀가루 공장 하던 이병철은 반도체 공장을 짓고, 쇠하고는 인연이 먼 박태준은 포항 해변에 제철소 기둥을 박았다.
요즘 하루가 아슬아슬하다. 정부 안에 '평창 이후(以後)'를 염려하는 사람이 없다. 낭떠러지 길에서 김정은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멋진 그림만 그린다. 정부 부처 심지어 대법원까지 적폐(積弊) 청산한다며 역사에 삽질하고 있다. 국가의 연속성, 법의 안정성은 안전(眼前)에 없다. 한·미동맹도 옛동맹이 아니다. 일본은 1930년대 동맹 정책을 그르쳐 패망(敗亡)의 길로 들어섰다. 만약 일본이 탐욕(貪欲)을 절제하고 연합국 편에 서서 승전국(勝戰國)이 됐더라면 한국 독립은 1960년대로 미뤄졌을지 모른다. 재협상을 요구하지도 못할 위안부 합의를 다시 주물러 일본 내 혐한(嫌韓) 세력의 기(氣)만 살려 줬다.
현 대통령과 전전(前前)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주고받고 있다.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치 보복 순서를 따라가고 있다. 핵심을 벗어나 대통령 부인과 명품(名品)을 엮는 서툰 수법도 비슷하다. 사냥꾼은 바뀌어도 사냥개는 옛날 그 검찰 그 국세청이다. 개헌을 하든지 아니면 청와대 옆에 교도소를 짓든지 할 일이다.
대한민국을 '30-50 클럽'에 올려놓는 데 무슨 공(功)을 얼마나 세웠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 나라가 당신들 나라냐'는 소리가 목젖 부근까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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