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관계자들은 ‘대통령이 파병 장병이 눈에 밟힌다고 했다’ ‘격무에 시달리는 임 실장에게 휴식을 주는 의미가 있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중국 방문(2017년 12월 13~16일)이라는 중대사를 코앞에 둔 시점에 비서실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비서실장이 특사로 나간 적이 있지만, 당시는 외국 대통령 취임식이라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출국 다음 날 청와대가 이 사실을 발표한 것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특별한 현안도 없는데 양국 지도자를 예방한다는 것도 뜬금없었다. ‘방문 목적’에 대한 청와대의 설명이 애매하자 궁금증이 증폭됐다. 이런 와중에 MBC는 2017년 12월 11일 “임 실장이 이전 정권의 비리와 관련해 중동 지역을 방문했다”는 취지의 보도를 했다.
2017년 12월 14일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MB 정부의 원전 수주와 관련해서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퍼트리는 문재인 정부를 그 나라 왕세제가 ‘국교 단절’까지 거론하면서 격렬히 비난하자 이를 수습하고 무마하기 위해서 임 실장이 달려갔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사실 전부터 야권 내부에서는 UAE 측 기류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가 계속 나왔다. 이명박 정부 당시 관계자는 “친여(親與) 인사들이 UAE 측에 ‘원전 수주 관련 리베이트 의혹’ 등을 계속 알아보고 묻고 했던 것으로 안다”며 “이런 것이 UAE 정부를 자극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명박 전 대통령을 공격할 거리를 찾다가 UAE 원전 수주에 대해 어떤 행동을 했고, 이에 UAE 왕세제가 ‘국교 단절’까지 거론하면서 격렬히 비난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임 실장이 달려갔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다.
청와대 거짓을 밝혀 낸 사진 한 장
2017년 12월 10일(현지 시각) 아랍에미리트(UAE) 수도 아부다비의 대통령궁에서 임종석(오른쪽에서 세 번째)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정 총책임자인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왼쪽에서 두 번째) UAE 왕세제와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왼쪽에서 첫 번째) UAE 원자력공사(ENEC) 이사회 의장을 만나고 있다. 칼둔 의장은 2009년 한국이 수주한 UAE 원자력 발전소 건설 사업의 총책임자이다. 사진=현지소식통 |
실제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칼둔 의장은 임 실장과의 면담 때(2017년 12월 10일) “거액을 주고 바라카 원전 건설과 함께 완공 후 관리·운영권도 한국에 맡겼는데, (탈 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건설과 운영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UAE는 문재인 정부의 탈 원전 정책이 추진될 경우 한국의 원전 전문가층이 엷어지고, 원전 부품·장비의 생산이 예전보다 못해질 것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 실장은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답변했다고 현지 소식통은 전했다. 칼둔 의장은 UAE의 실세인 무함마드 왕세제의 최측근으로 바라카 원전의 발주 단계부터 원전 건설 수주, 원전 운영권 계약 체결 등까지 모든 과정에 관여한 ‘핵심 인물’이다.
《조선일보》 보도 다음 날인 2017년 12월 19일 청와대는 임 실장의 UAE 특사 파견 배경에 대해 “큰 틀에서 (한국과 UAE) 양국 간 파트너십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을 바꿨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임 실장이 대통령 특사로 UAE를 방문했고, 양국 파트너십을 강화하는 데 단초가 됐다고 자평한다”며 “UAE에서 진행되는 원전사업은 문제가 없다. 원전사업에 대한 컴플레인이나 문제 제기 때문에 임 실장이 방문했다는 의혹은 사실 관계의 초기 단계부터 진단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설명에도 논란이 사그라지지 않자, 청와대는 하루 뒤인 12월 20일 “UAE가 박근혜 정부에 서운한 일이 있었다”고 새로운 이유를 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UAE가) 이전 정부에 서운하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우리는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이 있다”며 “처음에 (이명박 정부에서) 원전을 수주했을 당시에 비해 (UAE가 우리나라에)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이 관계자는 “원전을 이명박 정부에서 수주한 다음에는 (양국) 관계가 좋았다”며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국익 차원에서 잘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차원에서 (임 실장 방문이) 진행된 것”이라고 했다. 다만 서운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전 정부에서 있었던 내용이라고 들었다”고만 하고 구체적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와 UAE와의 관계는 각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월 9일 칼둔 칼리파 알 무바라크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공사 이사회 의장과 서울 성북구 한국가구박물관에서 오찬회동을 마치고 나오며 대화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김 의원은 언론 기고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12월 9일에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할 무렵 국방부가 위치한 서울 삼각지 주변에는 “지난 정부에서 아랍에미리트와 체결한 비밀 양해각서(MOU)가 탈이 났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필자는 정부 고위 관계자를 통해 두 정부 사이에 군사지원 내용을 담은 비밀 양해각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합의 문서는 국회에도 비밀로 되어 있어 그 존재 자체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가 집권 초 문재인 정부 내에서 골칫덩어리로 부각됐다. 이 양해각서가 체결된 시점과 정확한 내용은 아직도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 아랍에미리트 쪽에서 양해각서 내용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한국 정부를 강력히 성토하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원전 수출과 각종 자원협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영향이 초래된다는 점을 통보해 온 시점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난 5월 말에서 6월 초로 추정된다. 이 무렵에 문재인 대통령이 외교·안보 측근에게 “지난 정부의 국방 적폐가 너무 심하다”며 “그중에서도 중동 문제는 쉽지 않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정부 관계자는 전한다.〉
김 의원의 주장에 김태훈 SBS 국방 전문기자는 2013년 박근혜 정부가 UAE와 맺은 군수·군사 지원 협정의 핵심은 한반도 유사시 아크부대 철수를 위한 군수 지원이라고 밝혔다.
“당시 협정 문안을 직접 작성한 예비역 장성과 군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군수·군사 지원 협정의 골자는 한반도 유사시 아랍에미리트가 항공기를 제공해 아크부대 특전사 요원들을 재빨리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협정 내용 확인이 수월한 편이었는데도 이행에 문제가 생겼다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박근혜 정부 때 청와대 핵심 부서에서 일한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가) 무조건 전 정부 탓을 하는데, 이젠 정말 지친다”며 “UAE와 박근혜 정부의 사이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UAE에 각별한 신경을 썼습니다. 당초 2015년 5월 17~25일 UAE와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3국(國)’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세월호 사고로 인해 2015년 5월 19(오전 출발)~21일(오후 도착) 3개국 중 한 곳만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방문국으로 UAE를 선택했죠. 이유는 2014년 2월 UAE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 왕세제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박 전 대통령에게 방문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왕세제는 박 전 대통령과 오찬을 하면서 ‘내 어머니도 박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고 직접 뵙고 싶어했다. (내가) 방한하기에 앞서 어머니가 직접 박 대통령의 인생에 대해 말해 줄 정도로 관심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관계가 소원한 국가 정상들이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또 다른 관계자의 말이다.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UAE를 방문했을 당시 양국은 제3국 원전 진출에 협력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UAE와 손잡으면 발주가 임박한 사우디아라비아 원전 시장 진출에 파란불이 켜질 수 있기 때문이죠. UAE 실권자 무함마드 빈 자이드 왕세제는 사우디 실세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멘토’로 알려졌을 만큼 UAE는 사우디에 영향력이 큽니다. 만약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어떻게 양해각서를 체결했겠습니까? (문재인 정부의 전 정부 탓이)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같습니다.”
사우디는 총 2.8GW(기가와트) 규모 원전 2기를 2030년까지 지을 계획으로 이르면 올해(2018년) 발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업 규모는 200억 달러(약 21조4000억원) 이상으로 추산되며 한국은 중국·러시아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우디는 이후 원전 10기를 추가 발주할 것으로 알려졌으며 사업비 규모는 100조원을 넘을 전망이다. 첫 2기를 잡는 국가가 나머지도 갖고 갈 가능성이 크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사우디는 원전 건설을 추진하면서 UAE 원전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중동 국가인 UAE에 원전을 수출한 경험을 살리면 사우디에서의 수주 확률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이 UAE로부터 훈장을 받은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한 UAE 대사관 홈페이지에 따르면 UAE 측은 2017년 4월 27일 국방 분야를 포함한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해 김 전 실장에게 1급 훈장을 수여했다. 양국 관계가 소원했다면 김 전 실장이 1급 훈장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비밀 군사 협정 존재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UAE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청와대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은 상황에서 한-UAE 갈등설의 진원지가 이명박 정부 시절 맺은 비공개 군사 협약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임 실장 방문 직전 송영무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우리 군(軍) 수뇌부 인사들이 UAE를 잇달아 방문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임 실장 방문에 앞서 삐걱거리는 군사 협력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 군 지도부가 UAE를 찾았다는 것이다. 송 장관은 2017년 11월 1~3일 UAE를 방문했다. 중동 3국의 파병 부대 시찰이 이유였다.
그런데 당시 송 장관의 일정에는 청와대와 외교부 소속 인사들이 동행했다. 국방장관의 파병 부대 시찰에 청와대·외교부 인사들이 따라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국방부에 따르면 송 장관의 중동 순방 수행원 명단에는 국방부 인사들 외에도 청와대 안보전략비서관실의 최용선 행정관, 외교부의 윤순구 차관보와 최병선 중동2과장 등 비(非)국방부 인사들이 포함됐다.
송 장관의 중동 순방에 동행한 최 행정관은 여당 유력 의원의 보좌관 출신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에 들어갔다. 최 행정관은 첫날 UAE 일정만 송 장관 일행과 함께하고 나머지 일정은 따로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 차관보는 주이집트 대사를 지내다 지난해 9월 강경화 외교장관의 첫 본부 고위직 인사 때 발탁된 외시 22기 3인방 중 한 명이다. 윤 차관보는 현지 도착 이후 송 장관 일행과 완전히 다른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차관보는 한 달 뒤 임 실장의 UAE 방문도 수행했다.
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해군 소장)과 합동참모본부 군사지원본부장(공군 중장) 등도 UAE를 찾았다. 외교부가 주(駐) UAE 한국대사관과 주고받은 ‘2017년 하반기 문서 등록 대장’에 따르면, 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해군 소장)과 합동참모본부 군사지원본부장(공군 중장)이 지난해 11~12월 잇달아 UAE를 찾았다.
정양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문서 접수 시점을 확인한 결과, 합참 군사지원본부장은 12월 7~10일 사이, 해군본부 정보작전참모부장은 11월 14~15일 사이 방문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했다. 정 의원은 “현 정부 출범 후 이명박 정부 때 맺은 UAE와의 군사 협력을 축소 또는 재검토하면서 갈등이 불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군 고위 관계자들이 임 실장 방문 전 UAE를 찾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양국 간 군사 협력에 금이 가자 군 수뇌부와 국방장관, 임 실장이 잇따라 현지로 간 것이란 해석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1월 6일 자 〈[단독] “군사 협력 바꾸려다 UAE 반발… 임종석 보내 수습”〉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송 장관이 최근 정치권 인사를 만나 “새 정부 들어 이명박 정부 때 UAE와 체결한 군사 협력 내용을 변경하려다 UAE 측과 문제가 생겼고 이를 봉합하기 위해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이 UAE를 방문했다”고 밝힌 사실을 알렸다. 정치권 인사가 말한 바로는 송 장관은 그 방문과 관련해 “2010년 김태영 당시 국방장관이 UAE와 체결한 군사 협력 합의 중 일부 내용이 국내법에 저촉된다고 판단해 UAE에 가서 수정·조정을 요구했는데 UAE 측이 거부하면서 강하게 반발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1월 2일 UAE 국방특임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송 장관은 상대에게 “이명박 정부 때 맺은 군사지원 관련 합의 중 일부 내용이 한국 국내법에 따라 국회 동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게 새 정부 판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송 장관은 또 “이후 귀국해 대통령에게 UAE 측 반발을 보고했는데 대통령은 ‘국익을 위해 이 문제를 정리하자’는 뜻을 밝혔고 임 실장이 특사로 파견돼 사태를 수습하고 온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송 장관이 정치권 인사에게 한 설명대로라면 현 정부에서 과거 정부 때 합의 내용을 뒤집으려다 문제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한국 특전사에 반한 UAE
2018년 1월 9일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부 당시 UAE와 군사 협력 확대와 관련한 비공개 협약을 맺은 사실을 인정했다. 김 전 장관은 UAE와 비공개 군사 협약을 맺은 경위에 대해 “섣불리 국회로 가져가기보단 내가 책임지고 (비공개 군사) 협약으로 하자고 했다”며 “지금 시각에선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그땐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밝혔다. 김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의 국방부 장관(2009년 9월~2010년 12월)으로 UAE를 세 번 다녀오면서 UAE와의 군사 협력 문제를 매듭지은 당사자다.
군사 협력 확대와 관련한 비공개 협약 내용은 무엇일까. 이명박·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이 말한 바로는 ‘아크부대’가 UAE의 특전사를 훈련해 주는 것이다. 아크부대는 한·UAE 협력의 상징이다. ‘아크’(Akh)는 아랍어로 ‘형제’를 뜻한다. 무함마드 왕세제는 2010년 5월 26일 경기도 광주 특전사 대테러 훈련장에서 펼쳐진 아크부대의 대테러 시범을 본 뒤 한국 특전사의 ‘광팬’이 됐다. 손날로 두께 2cm 정도의 대리석판 20장을 격파하고, 웅크린 사람 8명을 뛰어넘어 몸을 한 바퀴 굴린 뒤 동료가 2.5m 정도 높이에 잡고 있던 송판을 발차기로 날려 버리는 등의 박진감 넘치는 모습에 반했던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제는 당시 김태영 국방장관에게 “이런 부대가 우리 UAE군을 훈련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2011년 1월 11일 오전 11시 한국군 ‘아크부대’ 특전사 장병 150여 명을 태운 비행기가 UAE를 향해 날아올랐다. 아크부대는 아부다비 알아인의 특수전 학교로 파병됐다. 알아인은 UAE의 국부(國父)인 자이드 초대 대통령이 성장한 지역으로 아부다비 왕가의 고향이다.
군사 협력 확대와 관련한 비공개 협약에는 UAE의 유사시 한국군이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은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UAE에 군사적인 어려움이 있을 때 한국군이 UAE에 와 주는 내용이 있었다. 우리가 계산했을 때 서로 국익에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협약을 체결했다. UAE는 오랜 기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나라다. 위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적고 만약 발생해도 북한과의 관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다만 김 전 장관은 이명박 전 대통령 측에 “인터뷰 당시 UAE의 유사시 한국군이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고 말한 적 없다”고 했다.
원전 수주와 군사 협약은 ‘패키지 딜’
왜 이명박 정부는 UAE와 비밀 군사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을까. 2009년 UAE는 ‘바라카(아랍어로 신이 내린 축복)’ 원전 사업과 향후 운영권을 프랑스에 맡기려고 했다. 이미 프랑스 원전을 사겠다고 프랑스 측에 통보해 양국이 서명할 날짜까지 정해졌다. UAE가 프랑스에 원전 건설을 맡기기로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세계 원전 시장은 미국, 프랑스, 일본이 나눠 갖고 있었다. 캐나다는 보유 기술이 노후했고 러시아는 원전 사고로 위축돼 있었다.
UAE는 2009년 11월 초 유명환 외교부 장관을 초청해 “프랑스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보고를 받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수화기를 들었다. 무함마드 왕세제에게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했다. 20조원 사업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참모들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며 이 전 대통령을 말렸다. 이 전 대통령은 “기왕에 안 된 것, 전화한다고 해서 더 손해 볼 것도 없지 않아요?”라며 계속 통화를 시도했다.
2009년 11월 6일 전화가 연결됐다. 경제 개발과 교육 지원 외에 안보 협력 카드를 던졌다. UAE는 부(富)는 큰데 인구와 방위력은 작은 불균형의 나라인 점을 노린 것이다. 실제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는 UAE는 시아파 맹주이자 군사 강국인 이란과 친이란 무장단체 예멘 반군으로부터 안보 위협을 받고 있어, 군사 협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핵심 안보 전략이 다른 나라와 협력 관계 구축이다. 방위협정을 체결하고 외국군 주둔도 허용한다. UAE에는 미국·영국·프랑스·호주 등 6개국 3500여 명이 주둔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의 안보 협력 제안에 UAE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009년 12월 15일 UAE는 한국에 원전 건설을 발주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UAE의 유사시 한국군이 자동 개입한다는 조항 등이 담긴 협약을 요구했다. 세계 6번째 원전 수출국으로 이름을 올린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국회 동의 없이 군대 파견을 약속한 것에 대해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실제 파병이 이뤄지려면 국회 동의 절차가 필수인 만큼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태영 전 장관이 “위험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작고, 실제 문제가 일어나면 그때 국회 비준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시각에선 문제로 보일 수 있지만 2009년엔 국익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 특수부대를 파견, UAE의 특전사를 훈련시켜 달라는 요청도 했다. 이는 우리 특전사의 전투력 강화에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수백억 원짜리 첨단 대테러 훈련 시설을 맘껏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계약에 참여한 관계자는 “1만 피트(약 3300m) 이상 고공 점프나 야간 점프의 경우, 국내에선 6년 동안 해야 할 훈련을 UAE에선 8개월 만에 소화하며 국내엔 없는 무기를 마음껏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우리 국방력 향상에 득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UAE는 미국·유럽에서 최신 무기를 도입한다. 세계에서 좋다는 무기는 다 갖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는 “원전 수주와 군사 협약은 ‘패키지 딜’이었다. 군사 협약 없이는 원전 수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했다.
박근혜 정부도 비밀 군사 협정 여부 파악
이런 사실을 박근혜 정부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전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이가 좋지 않은 만큼 박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가 UAE와 비밀 군사 협정을 맺은 사실을 폭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솔직히 비밀 군사 협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국익만 생각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전 세계의 국가 간 대형 거래엔 밝히지 않는 이면 합의 사항이 있는 것이 상례(常例)다. 이를 까발린다면 그 나라와 관계가 어떻게 되겠나. 특히 UAE와는 노무현 정권 때부터 군사, 문화, 원전, 에너지, 의료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이뤄져 왔고 이런 협력들은 상호 연계돼 있다. 어느 하나가 흔들리면 연쇄적으로 악영향이 미치는 구조인 만큼 비밀을 유지한 것이다.”
그는 이어 “박 전 대통령은 이런 사실이 여과 없이 공개될 경우, 우리가 극단주의 무장 단체 ‘이슬람국가(IS)’와 연결돼 있다는 오해를 살 수 있고, 이 경우 중동 내 수니파·시아파 간 싸움에 말려들어 시아파 맹주인 이란과의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굉장히 우려했다”고 전했다. UAE는 IS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수니파에 속한다.
문재인 정부 아크부대 축소 움직임
박 전 대통령은 임기 중 이란과의 관계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2016년 5월 1일 한국 대통령으로는 1962년 국교 수교 이후 처음으로 이란을 방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란은 인구 8000만명에 가스 매장량 세계 1위, 원유 매장량 4위의 중동(中東) 지역 핵심 국가다. 인구의 절반이 25세 이하일 정도로 젊어 성장 잠재력도 크다. 우리나라는 1979년 이란의 반미(反美) 혁명 이래 국제 제재를 받는 동안에도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UAE와 비밀 군사 협정을 축소 또는 재검토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UAE에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한국이 군사적 지원을 하는 조항이 국회 동의 없이 수립됐다면 이를 이행하는 데 헌법상 적법성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현 정부에서 아크부대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이 같은 논란과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는 당초 현재 140명 규모인 아크부대(현재 중령)를 군사협력단(단장 대령) 수준으로 격상시키려 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재검토로 선회한 것으로 알려졌다. 군 관계자는 “아크부대를 키우려다 흐지부지된 걸로 안다”고 말했다. 군은 지난 8월 방산(防産) 협력에 초점을 맞춰 영관급 인력 6명으로 구성한 국방협력팀(팀장 대령)을 UAE에 파견키로 했다. 하지만 UAE 측이 “(방산보다는) 특수전 교육에 집중해 달라”며 이견을 표시해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관계자는 “아크부대 철수는 검토한 적이 없지만, 군 직제 개편 과정에서 아크부대 지휘관(현재 중령)의 급에 대한 논의는 있었다”고 말했다. 규모 축소보단 부대의 성격 조정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청와대 측은 “지난(2017년) 12월 1일 국회에서 파병 연장 동의안이 통과됐고, 파병 부대도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국정원의 줄 서기?
2017년 12월 19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가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의 UAE 방문과 관련, 증거 사진을 들고 발언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일각에서는 현 정부가 과거 문서를 검토하다가 비공개 군사 협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UAE에 수정을 요구한 것이 제 발등을 찍은 게 됐다는 분석이 있는데, 우리가 파악하기에는 UAE에서 활동하는 국정원 요원이 이런 사실을 이전 정부의 적폐로 보고해서 일이 벌어졌다. 국정원 직원은 자신이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지식경제부 1차관을 지냈고, 박근혜 정부에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지낸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은 해외정보 파트를 담당하는 국정원 1차장(서동구)이 임 실장이 UAE 왕세제와 만날 때 배석한 것을 이유로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가 UAE 왕세제를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UAE에 나와 있는 국정원 직원이 뭔가 일을 서투르게 했고, 이를 무마하려고 서동구 차장이 동행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임종석 실장은 “(지난해) 11월 말부터 갑자기 현지 기업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애로를 호소하는 등 상황이 발생해 급히 특사로 가게 됐다”고 김성태 원내대표에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많은 퍼즐 조각들을 맞춰 본 결과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원전 수주 당시 비공개 군사 협약을 맺은 사실을 국방부 적폐청산위원회 또는 국정원에서 알아내 보고→ 문재인 정부, 송영무 국방부 장관 통해 합의 내용을 뒤집으려는 움직임→ UAE 국교 단절까지 거론하면서 격렬히 비난, 문재인 대통령 사과 요구→ 수습 위해 군 수뇌부와 임종석 실장 UAE 파견→ 청와대 부인.〉
만약 이명박 정부 때 맺은 비공개 군사 협약에 큰 문제가 있다면 UAE 국교 단절을 거론하더라도 뒤집는 게 맞다. 하지만 수습을 택했다. 결국 수습할 일을 애초에 왜 문제 삼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