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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본문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하기까지 과정
최소한 1947년 12월 중순 까지는 대한민국 건국에 반대 않음. 그 근거로 12월 1일, 4일의 성명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 1947.12.1 성명 요지
유엔결의안에 따른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지지. "설사 소련군의 방해로 북한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은 법리상, 그리고 국제관계상 통일정부요, 단독정부가 아니다."
[지금의 종ㅇ기들은 이 날의 성명서가 가짜라는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하는데, 이를 깨는 성명이 12월 4일 또 나옴]
- 1947.12.4 성명의 요지
3일전인 12년 1일의 성명이 자신의 진심임을 재천명. "나와 이승만 박사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즉시 실현하자는 목적에 완전히 합의" 하였다고 밝힘.
여기까지 보면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좋겠으나, 그 해 12월 말 급작스럽게 입장이 바뀌어 대한민국 건국에 등을 돌리게 된다. 그 과정을 보자.
- 12년 2월 한민당(한국민주당)의 유력간부인 장덕수 선생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김구가 배후 조정자로 지목됨
- 유엔한국임시위원단과 회담할 한국민족대표단 구성 문제를 둘러싼 한민당과의 감정적 갈등 등을 요인으로 하여, 대한민국 단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에 이르름.
이러한 급작스러운 김구의 반대 입장은 심지어는 자신이 이끌던 한독당(한국독립당)에서 공식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취한 결정.
김구의 태도 돌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끌던 한독당은 지속적으로 이승만 박사의 건국노선에 협조적인 입장을 천명. 즉, 북한을 접수한 소련의 유엔대표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방문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힌 직후인 1948년 1월 25일, 한독당은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함.
바로 다음 날인 1월 26일, 김구는 "미.소 양군이 철퇴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양군이 철퇴한 후에 남북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정부를 해야 한다"고 선언.
위의 선언은 소련이 북한을 공산화 시키는 준비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문제의 유엔 상정을 지속적으로 거부하기 위한 논조였으며, 당시는 소련이 남한의 김구와 김규식을 끌어들이기 위한 술책을 쓰던 중이기도 했다.
결국은 김구가 그 트랩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심지어 그가 19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이라는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비난하기에 이르르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좌익세력이 남한 선거 반대를 위해 이른바 2.7구국투쟁을 시작한 지 4일 째 되던 날.
결국은 김구의 감상적인 성명이 선거 반대 선동하던 좌익들을 성원하는 결과를 나타내게 됨.
과연 김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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