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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대한민국

생-쥐스트

j.and.h 2018. 1. 7. 08:08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은 흔히 프랑스 혁명기의 냉혹한 혁명가로 로베스피에르만 알고 있지, 더 무섭고 더 차가운 인물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은 잘 모른다. 아직 솜털도 채 가시지 않은 20대 초반의 나이에 루이 16세 처형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실각하여 27세의 나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혁명 이론가 생-쥐스트(Saint-Just)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젊음과 천재성에 대한 인류 보편의 동경심과 사상 유례 없는 공포정치의 잔인함이 합쳐져 그의 인생은 완전히 전설로 물들어 있다. 미소년이라느니, 처형장에 끌려 갈 때도 냉정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압도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24세에 이미 『프랑스의 헌법정신과 혁명 정신』(1791)이라는 책을 썼고, 법정 연령이 되기를 1년 기다려 국민공회 의원이 되었으며, 그해 10월 의회 연단에서 행한 연설이 그 유명한 루이 16세 논고장이다. “누구도 무죄로 군림(君臨)할 수 없다”(One cannot reign innocently. On ne peut régner innocemment.)라는 마지막 문장이 역사에 길이 남아 있다. ‘군림한다’는 것이 벌써 유죄라는 것, 그러니까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유죄라는, 도저히 논박 불가능한 무서운 구절이었다. 그때까지 무명이던 이 젊은 의원의 발언이 자코뱅의 공식 입장이 되어, 결국 석 달 뒤(1793년 1월 21일) 왕은 기요틴에서 처형 되었다.

  루소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생-쥐스트는 왕이 처형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사회 계약론’에서 찾았다. 사회계약론에 의하면 법이란 사회계약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법은 사회계약에 동의한 사람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런데 왕은 그 어느 때도 사회 계약을 체결한 적이 없이, 법의 위에 군림해 있었다. 다시 말해 법의 밖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계약을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법 조항을 그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왕에게는 그 어떤 사회체의 법도 적용할 수 없고, 다만 사회 전체가 적으로 간주해야 할 절대적 적일뿐이다.

  그러나 생-쥐스트는 왕이 사회 전체와 같은 무게의 대칭 관계가 되는 것은 극도로 경계했다. 그래서 그는 “전제군주에 대항하는 인간의 권리는 개인적인 권리이다”라는 말로 왕에 대한 개인적 적대 관계를 강조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왕에 대한 처리가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일반적인 동의가 없더라도 아무나 루이 16세를 죽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왕의 처형 후 공포정치는 극에 달하여, 밀고(密告)가 시민의 의무이고, 단두대는 덕의 제단이 되었다. 혁명에 열의를 표시하지 않은 사람, 혁명에 반대하는 언사를 한 사람, 혁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 하다못해 베르됭의 처녀들(1792년 베르됭에 진주한 프러시아 군을 환대한 처녀들)까지 희생되었다. 단두대도 총알도 모자라 나중에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익사형(구멍 뚫은 배에 사형수들을 실어 강물에 띄우는 방법)이 권장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목이 ‘기왓장 날으듯 날은’ 시기였다.

  차츰 국민 전체가 단두대의 처형에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의회 승인 없이 의원을 기소할 권리를 요구한 후 부터 의원들은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불안감을 느낀 반대파 의원들이 테르미도르(지금 달력으로는 7월) 8일, 두 사람의 체포 동의안을 가결했다. 즉각 체포된 로베스피에르와 생-쥐스트는 바로 다음날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소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불리는 이 날로 2년간의 공포정치가 막을 내렸다.

  대선 유력 주자가 ‘혁명’을 마구 입에 올리며 ‘법은 소용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작금이다. TV 프로의 젊은 여성 출연자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가전 장면이 감동적이라고 어쩔 줄 몰라 한다. <레미제라블>의 시가전은 대혁명 이후 40여년이 지난 1830년대의 사건으로, ‘혁명’이라는 명칭도 얻지 못한 일개 소요 사태였다. 그 많은 사람들의 피를 뿌린 공포정치 이후 40년이 지나났는데도 아직 민중의 삶은 비참(미제라블, misérable)하고, 정치는 민주적 공화제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 소설(영화)의 교훈일 것이다.

  프랑스는 대혁명 이후 두 번의 제정(帝政), 두 번의 왕정, 그리고 가혹한 학살 사건을 곁들인 세 번의 혁명을 80여 년간 겪고 난 뒤, 1870년에 와서야 현재 체제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박정자 교수님, 2017년 1월 5일자 동아일보 ‘동아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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