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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공부하라 본문
<<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공부하라 >>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라는 유명한 로마 격언이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인류사는 전쟁사이다" 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3,421년 역사 중에 전쟁을 겪지 않은 해가 고작 268년 미만이라는 연구조사(Will Durant) 등을 볼 때, ‘전쟁’은 인류 역사와 사회 흐름을 이해하는데 필수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비밀을 맡아(고전4:1, 롬11:25) 그 선교적 사명에 적극 동참하고자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사회의 가장 흉악한 면모를 보여주는 ‘전쟁’을 고찰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와 그 깊은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거룩한 소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공부하라” 라는 지침을 가진, 세계 유일의 전쟁학부가 있는 런던대학교 킹스컬리지(King's College London)에서 세부전공으로 ‘분쟁안보개발학(Conflict, Security and Development)'을 공부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부각된 대(對)테러학을 비롯하여 현대전의 양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프리카 탈식민 이후의 내전, 그리고 분쟁 후 안보구축과 전후개발학 등을 공부하면서, 나는 국가의 존립이나 이념대립, 혹은 국제정치의 무정부적 현실로 인한 분쟁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분쟁의 현실이 여론을 통해 너무 쉽게 단정되고 판단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과 바른 관점이 부재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단적인 예로서, 미국의 소위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역작용으로 반미정서가 붐을 일으킬 때,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여 대중 공포를 유발하려고 하는 ‘테러리즘’ 을 ‘독립운동’으로 이해하여 감싸고 동정하는 몇몇 시민단체와 젊은 층의 정서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존 거대담론의 파괴를 미화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테러리즘’과 ‘독립운동’의 개념차가 단지 ‘입장차’일뿐이라는 파격적인 역발상은 일부 젊은 층의 반항적 기호에 만족감을 주면서 특정 정치이익집단에게 이용되기 쉽다. 때문에 그런 위험하고 파괴적인 곡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바른 마음 자세와 균형 있는 사고가 더욱 필요하다 하겠다.
벌써 일주년이 되어가는 천안함 사건과 작년 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나라의 안보현실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G20을 주최하는 지도급 국가인 만큼, 우리나라는 국격에 걸맞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위치에 왔다. 따라서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촉발된 아랍권 민주화 유혈사태, 거듭 결렬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 아프리카의 종족갈등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분쟁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섣부른 속단을 피하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균형 있는 사고의 관점을 가지고 분별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을 직시하는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먼저 이 세상의 전쟁과 같은 세상현실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시6:11) 참 평화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눅19:42)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자세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할 균형 있는 사고의 관점으로서는, 세상 권세 아래서는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정의’ 대 ‘평화’, 그리고 ‘자비’ 대 ‘진리’가 만나 조화(시85:10)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곧 복음에서 밖에 찾을 수 없다는 선교적 관점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어야 하는 구원의 원리(롬8:1~2)를 볼 때, 예수님 ‘밖에서’ 평화를 찾고 사회개혁을 도모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 그것이 사회주의이던 자유주의이던, 왕권체제이던 민주체제이던 -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서 전쟁이 난무하고 악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학문에서조차 평화로운 ‘이상(理想)적인 사회‘ 는 ’유토피아‘ (ou-toppos), 곧 '없는 곳' 이라고 결론 내린다. 인간에게 ‘죽음’이 그러하듯이, 전쟁도 인류가 직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오로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눅2:14, 사9:6, 2:4).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기준과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비로소 겸손하게 각자의 맡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기도자와 행동가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C. S. 루이스도 이런 맥락에서 반전주의와 같은 온갖 주의자들의 열광적인 주장에 대하여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아닌가>라는 반론을 펼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고통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확증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최선의 결과를 이뤄 내는 사람들은, 보편적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면한 과제에 성실히 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 조 평 세 (분쟁안보개발학 전공)
‘Si vis pacem, para bellum’.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라는 유명한 로마 격언이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인류사는 전쟁사이다" 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3,421년 역사 중에 전쟁을 겪지 않은 해가 고작 268년 미만이라는 연구조사(Will Durant) 등을 볼 때, ‘전쟁’은 인류 역사와 사회 흐름을 이해하는데 필수요소임에는 틀림없다. 더구나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비밀을 맡아(고전4:1, 롬11:25) 그 선교적 사명에 적극 동참하고자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인간사회의 가장 흉악한 면모를 보여주는 ‘전쟁’을 고찰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와 그 깊은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거룩한 소명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공부하라” 라는 지침을 가진, 세계 유일의 전쟁학부가 있는 런던대학교 킹스컬리지(King's College London)에서 세부전공으로 ‘분쟁안보개발학(Conflict, Security and Development)'을 공부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부각된 대(對)테러학을 비롯하여 현대전의 양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아프리카 탈식민 이후의 내전, 그리고 분쟁 후 안보구축과 전후개발학 등을 공부하면서, 나는 국가의 존립이나 이념대립, 혹은 국제정치의 무정부적 현실로 인한 분쟁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한 분쟁의 현실이 여론을 통해 너무 쉽게 단정되고 판단되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과 바른 관점이 부재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단적인 예로서, 미국의 소위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역작용으로 반미정서가 붐을 일으킬 때,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하여 대중 공포를 유발하려고 하는 ‘테러리즘’ 을 ‘독립운동’으로 이해하여 감싸고 동정하는 몇몇 시민단체와 젊은 층의 정서에 대하여 적절히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기존 거대담론의 파괴를 미화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테러리즘’과 ‘독립운동’의 개념차가 단지 ‘입장차’일뿐이라는 파격적인 역발상은 일부 젊은 층의 반항적 기호에 만족감을 주면서 특정 정치이익집단에게 이용되기 쉽다. 때문에 그런 위험하고 파괴적인 곡해들을 분별할 수 있는 바른 마음 자세와 균형 있는 사고가 더욱 필요하다 하겠다.
벌써 일주년이 되어가는 천안함 사건과 작년 말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나라의 안보현실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이제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G20을 주최하는 지도급 국가인 만큼, 우리나라는 국격에 걸맞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영향력을 발휘해야 하는 위치에 왔다. 따라서 최근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촉발된 아랍권 민주화 유혈사태, 거듭 결렬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 아프리카의 종족갈등 등,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대립과 분쟁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섣부른 속단을 피하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균형 있는 사고의 관점을 가지고 분별하여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세상을 직시하는 마음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먼저 이 세상의 전쟁과 같은 세상현실에 대하여 그 누구보다도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시6:11) 참 평화를 알지 못하는 세상을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의 마음(눅19:42)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 자세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져야할 균형 있는 사고의 관점으로서는, 세상 권세 아래서는 도저히 화해될 수 없는 ‘정의’ 대 ‘평화’, 그리고 ‘자비’ 대 ‘진리’가 만나 조화(시85:10)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곧 복음에서 밖에 찾을 수 없다는 선교적 관점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되어야 하는 구원의 원리(롬8:1~2)를 볼 때, 예수님 ‘밖에서’ 평화를 찾고 사회개혁을 도모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 그것이 사회주의이던 자유주의이던, 왕권체제이던 민주체제이던 - 제한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다르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서 전쟁이 난무하고 악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학문에서조차 평화로운 ‘이상(理想)적인 사회‘ 는 ’유토피아‘ (ou-toppos), 곧 '없는 곳' 이라고 결론 내린다. 인간에게 ‘죽음’이 그러하듯이, 전쟁도 인류가 직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오로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가능한 것이다(눅2:14, 사9:6, 2:4).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기준과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비로소 겸손하게 각자의 맡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기도자와 행동가로서의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C. S. 루이스도 이런 맥락에서 반전주의와 같은 온갖 주의자들의 열광적인 주장에 대하여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아닌가>라는 반론을 펼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고통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확증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최선의 결과를 이뤄 내는 사람들은, 보편적 정의와 평화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면한 과제에 성실히 임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 조 평 세 (분쟁안보개발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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